2025-2026

더운 날
 
잔디밭 위에
가만히 배를 대고 누웠다 
 
처음으로 
벌거벗은 나무를 본 날
무색하게도 
오래 지났지만 
손금에 스미던 빗물이 
아직 축축하다 
 
죄 많은 목덜미 위로 
알고 지내던 하루살이가 
날아갈 때에도
 
나는 아직
제 서러움만 세고 있었다 

May 2026

애인
 
가장 딱딱하게 얼어 붙은 빵
터무니없게 매운 고추
고집 센 마늘
말라붙은 질긴 고기
그의 불덩이 같은 가슴
뭉툭한 손가락으로 빚어올린 단단한 매듭을
나는 혼자서 그리워하는 법을 배웠지

Sep 2025

철학자
 
석유를 뒤집어 쓴 밤
연필처럼 등대가 솟았다
잠 든 척추의 능선 위로 새겨지는 모스부호
응급한 메시지는 아무 말이 없다
해일이 탄 썰매가 폭죽처럼 부서지고
말린 자두처럼 쪼그라든 심장을 널어둔 방파제도
세상 너머로 곤두박질 치는데
마지막으로 사랑을 노래한 사람은 누구인가

 

Tar poured over the night sky.
A lighthouse rises
and shines like charcoal.
Someone carves the Morse code
along the cliff ridge.
The spinal cord sleeps, not knowing.
The urgent message says nothing.
But when a sleigh of storm surges,
bursting and crashing into fireworks,
A heart preserved,
hanging on the pier,
shrivelled like dried plum,
hanging on the pier,
shrivelled like dried plum,
There’s the last one
who sings of love.

Sep 2025

두 여자
 
모두 같은 속도로 절벽을 향해 등 떠밀리고 있나요
우리는 희노애락의 전선 너머로 도망갔어요
무동을 탄 슬픔도 훌렁훌렁 벗어버리고
울부짖는 뼈의 산을 넘어
아무런 축복도 없이
공허한 태양을 뚫고 지나가요
좌절된 흰 손수건을 찢어
끓어오른 발바닥을 맞잡아요

Sep 2025

 
너의 흰자위같은
새파란 알약을 삼킬거야
 
탄산이 분출하듯
내 몸 속에서 뜨겁게 녹아
심장은 별의 탄생처럼 뛰고
나는 얼굴이 붉은 여자
 
아스팔트 도로 저 편
리듬체조 선수처럼 힘차게 뛰어
폴 짝 그리고 다시 땅에
가벼워진 발끝이 닿는 순간
핑그르르- 돌아간 은색의 지평선
 
낮도 밤도 아닌
내게 금지된 것을 허락하는
끈적한 액체가 범람한 하늘
 
귓속에선 달콤한 트위스트
운석같은 돌들의
황홀한 춤

Jun 2025

마마이트 토스트와 촛불 위성
 
크리스마스 날 아침, 어린 조카가 들뜬 표정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큰 트리가 있는 거실에 모두 모여 선물을 주고 받았다. 어린 조카가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크리스마스 디너로는 오븐에 구운 감자, 당근, 방울양배추, 넛 로스트, 요크셔 푸딩을 먹었다. 그레이비, 크랜베리 잼, 그레이비, 사과 소스와 민트소스가 담긴 병이 테이블을 바삐 오갔다.
내가 산타를 믿지 않게 된 이후로 우리 부모님은 밤 사이 내 머리 맡에 살금살금 선물을 두고가는 걸 그만두셨다. 대신 우리는 백화점에서 사온 고급 과자점의 홀케이크를 나눠먹곤 했다. 혀에서 녹아내리는 생크림과 딸기의 맛보다도 한낮의 여유와 오랜 낮잠이 달콤한 하루였다.
웨일스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는 저녁 늦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계속되는 재채기 때문에 나와 벤이 묵는 손님방에서 잠깐 쉬었다. 높은 침대와 나무로 된 서랍장, 복실복실한 붉은 러그가 깔린 아늑한 방이었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었고 책장에는 빼곡한 책들이 저자의 이름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전에 사서로 일하셨다.
그의 가족들을 만나면 나는 항상 그들처럼 책을 더 읽고,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또렷하면서도 느긋한 미소는 전부 책과 채소, 과일들에서 온 것만 같다. 굽거나 볶은 채소로 가득한 식사를 마치면, 접시를 치우고 과일 바구니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오렌지, 사과, 키위 등으로 식사를 마쳤다. 나는 나이프로 서툴게 사과를 깎아 몇 조각을 그의 접시에 두었다. 그가 ‘Thank you, Love’ 라고 했다. 나는 살짝 웃었다.
저녁 테이블을 정리한 뒤에는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들고 거실에 모여 앉는다. 가운데에는 가스 벽난로가 있고, 그 앞에 놓인 큰 러그를 가운데 두고 2인용 소파, 3인용 소파, 안락의자가 둘러싸고 있는 따뜻한 방이었다. 작은 가족사진과 도자 장식품들이 책장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어머님이 커피를 두 잔 타와 아버님께 건네면, 그는 ‘Thank you, Love.’라고 한다. 영화가 재생되기 전 벤과 나는 부엌으로 시골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찬장에서 비스킷이 종류별로 담긴 상자를 꺼낸다. 달콤한 초콜릿이 겉을 감싸고 있는 비스킷을 작은 접시에 담고 살금살금 거실로 돌아가 영화를 본다. 나는 조용한 장면에서 바삭한 생강맛 비스킷을 베어물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손님방의 커튼은 두꺼웠고 라디에이터가 공기를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아직도 비스킷의 단맛에 취한 나는 푹신한 자줏빛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스르르 잠에 들었다.
오전 시간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카펫이 깔린 계단을 왔다갔다하며 창틀에 놓인 나무 조각들을 보았다. 아버님이 목공방에서 직접 만들어온 작은 그릇들과 장식품들이었다. 손님방 맞은편에 있는 서랍장 위에도 나무 그릇이 여러개 있었다. 안에는 동전, 반지, 작은 부품들이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크리스마스 엽서들과 가족사진, 비상약이 담긴 작은 상자가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작은 유리병과 나무 조각상들을 마다하지 않는 여유로움, 8월에도 찬 북 웨일스의 맨몸으로 바다에 훌쩍 뛰어드는 담대함, 신선한 달걀과 채소로 가득한 냉장고, 아침식사 테이블에 종류별로 마련된 빵과 스프레드, 티스푼, 냉장고 옆 큰 종이 달력, 가스 벽난로, 초콜릿 상자, 이미 다 먹어버려 실과 바늘을 담는 통으로 쓰이는 것도, 가족사진 앨범, 자선가게에서 사 온 어린이용 블록놀이,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세면대와 쓰이지 않는 욕조.
어릴 적 소설에서나 읽었던 두꺼운 금장 자수 장식의 커튼이라던지 정원으로 이어지는 온실, 뒷마당의 사과나무와 줄기콩 따위의 것들이 이들의 집이었다. 내가 양 손에 포크와 숟가락, 나이프를 바꾸어 쥐는 동안 그들은 오른손에 나이프, 왼손에 포크를 쥐고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아니오’라고 하지 않았다. 단어들은 언제나 매끄러운 곡선의 모습이었다.

Jan 2025

말은 글보다 관대하다.
단어 사이의 공백이나, 불필요한 추임새, 어, 음, 가끔은, 더듬거리고, 어순을 섞어서 말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말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은 어떻게 글이 될까 생각해본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나인데 글은 왜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글을 괴롭히고 있는 걸까? 길을 걷다가 건물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일 때, 그 유리벽 건너편의 사람도 나를 본다.
언제부터 나는 보여지는 사람이 되었을까? 보여지다. 보이다. 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동사들 사이에 글자를 하나씩 덧붙였다. 쓰다, 쓰이다. 보다, 보이다.
‘-이’ 접미사가 한쪽 면이 거울인 유리처럼 단어 사이에 끼어들어, 이제 내 방은 두 공간으로 갈라졌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보거나 거울 너머의 무언가가 나를 본다. ‘보여지는 사람’에서 ‘보여지다’는 문법적으로 옳지 않다. ‘보이다’에 ‘-어지다’까지 과하게 붙인 이중피동의 형태 뒤에 나는 어쩌면 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몇번이고 숙여야만 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살다’라는 동사에도 피동형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살다-살리다’의 경우 ‘살리다’는 사동사의 형태를 띈다. 사동사의 경우 기본형이 되는 동사에 다양한 접미사를 붙여서 만들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리-‘가 붙었다. 접미사를 붙이는 것 이외에 사동문을 만드는 방법은 ‘-게 하다’를 붙이는 것이다. ‘살다-살리다-살게 하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리-’와 ‘-게 하다’라는 타인이 등장했다. ‘살리다’와 ‘살게 하다’의 차이점은 그 의도의 분명함에 있다. ‘나를 살게 한 것’은 나를 살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나를 ‘살린 것’보다 분명하다.
‘살다’는 동사일까 형용사일까? 울음과 함께 내가 첫 숨을 내쉰 그 순간, 살아있다는 상태가 신호가 되어 나는 숨을 쉬기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살아 온 걸까? 그 첫 숨부터 나는 동사로서 살아온 걸까?

Dec 2024

글쓰기

 

정신의 교통체증
새 떼처럼 날아드는 낱말들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편안하다

Dec 2024

시야
가장자리에 흔들리는 목도리의 끝자락이
발 밑에 뛰어드는
까마귀인줄 알고 나는 소스라쳤다
벌건 광대 뼈 눈 주위에
싸락눈이 떨어진다
바람이 무참히 케이블을 끊어
시끄럽던 도로가 조용하다
나는 서른 살에 자신을 죽인 시인을 생각하며
값 싼 초콜릿을 사러 마트로 향했다

Nov 2024

조석 간만의 차
 
지금은 다 잊었다
구명조끼 색으로 빛나는
귀에 꽂은 체온계의 수은은
내가 모르는 새
올랐다 내렸다 한다
강 가까이에서
눈 앞머리를 누르면
붉은 씨앗이 터지듯 흐르는 것을
상상한다
영원히 알지 못할 법칙

Sep 2024